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이탈리아

[이탈리아] 베네치아 - Venezia / 베니스 / Venice / 물의 도시 / 아드리아해의 여왕

by 훈바오 2024. 3. 18.
728x90
반응형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의 중심 도시.

동시에 해당 도시를 수도로 삼던 과거의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명이기도 했다.

흔히 베니스(Venice)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영어식 발음이다.

본토 이탈리아어 발음으로는 베네치아(Venezia)다.

프랑스어로는 브니즈(Venise), 독일어로는 베네디히(Venedig)라고 부른다.

인구는 2017년 기준 26만 명으로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이 중 대부분은 바다 위의 구도심이 아니라 육지 쪽의 신도시에 살고 있다.

그리고 신도시에 베네치아의 창구인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국제공항이 있기도 하다.

현대 도시로서의 중심지는 신도시로 상당히 옮겨왔고, 구도심은 관광지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구도심 도시 전체에 수로가 뚫려 배를 타고 다닌다 해서 물의 도시로 유명하며, 현재도 베네치아 구도심 내부에는 자동차 도로가 하나도 없다.

구 도심 입구쪽의 로마광장(Piazzale Roma, 기차역 옆에 있다)에 시외버스와 차들이 돌아다니지만,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단 한대의 차량도 볼 수 없다.

보행자도로도 좁은 다리나 계단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 오토바이조차 한 대도 볼 수 없다.

따라서 새벽에도 차량 소음 등은 전혀 없다.

거기에다가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벌금을 문다.

따라서 현재에도 구도심 내 이동수단은 튼튼한 두 다리와 수상택시, 수상버스(바포레토) 뿐이다.

심지어 이들도 운행시 발생하는 파도로 인한 도시 균열을 막기 위해 좁은 운하에서는 7km/h, 넓은 곳에서는 11km/h 정도로 속도 제한을 두고 있다.

따라서 무라노 섬이나 부라노 섬을 가지 않는 한 오히려 걷는게 더 빠를 경우도 있다.

베네치아 신도시 지역의 도시철도인 베네치아 트램의 1호선의 남쪽 종점이 구도심의 베네치아 피아찰레 로마(Venezia Piazzale Roma)역이다.

또한 베네치아의 중앙역인 베네치아 산타 루치아(Venezia Santa Lucia)역도 구도심의 북쪽 끝에 있다.

수많은 운하의 물길이 도로를 대신하는 특이한 도시구조 덕에 수상도시의 대명사가 되었고, 운하가 촘촘하게 들어찬 세계의 다른 도시들도 대부분 xx의 베네치아라는 식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나 스웨덴의 스톡홀름은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며, 그 외에 독일의 함부르크와 밤베르크,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포르투갈의 아베이루, 중국의 쑤저우, 일본의 야나가와 등이 그러한 케이스이다.

김포 한강신도시도 LH에 따르면 아시아의 베네치아라고 한다.

자매품으로는 xx의 암스테르담이 있다. 그리고 조금 생뚱맞지만 베네수엘라라는 국가 이름도 여기서 따 온 것이다.

베네수엘라 원주민들이 수상가옥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처음 본 유럽인 탐험가가 베네치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본래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동북부에 거주하던 베네티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베네티족의 준마는 뛰어나기로 유명해서 그리스 본토나 식민도시에서도 말을 구하기 위해 베네티족에게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기원전 3세기경부터 로마에게 동화되어 서서히 흡수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이 로마 시대에는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현재에도 이 지역에는 베네토와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과거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에 속했던 지역이다.

그런데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던 시점에는 '베네티아'가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해안가를 일컫는 말이 되었으며, 그 때문에 도시 베네치아에 베네치아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쨌든 고대부터 베네티아 해안가의 석호지대에는 어부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로마인들은 이들을 "석호 거주민(incolae lacunae)"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본디 습지대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미개발지에 가까웠으며,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베네치아는 5세기경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고트족과 훈족 등 여러 이민족들의 약탈을 피해서 파두아, 아퀼레이아, 콘코르디아, 트레비소, 알티노 등지에서 온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이 이 석호의 섬들(토르첼로Torcello, 이에솔로Iesolo, 말라모코Malamocco)로 모였다.

초기 정착민들의 흔적은 이들의 정착과 함께 건설된 산 쟈코모San Giacomo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원래 이 섬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섬 전체가 습지대였기 때문에 주거 환경이 열악했고, 지대가 물러서 제대로된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몇 년만 머물 곳으로 여겼다.

그러나 고트족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아예 이탈리아에 정착해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로마의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기한없이 머물만한 영구 정착지를 늪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다.

그들이 떠올린 방법은 물컹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기다란 말뚝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빼곡히 박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 어마어마한 육체노동을 통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올릴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일대를 수복했을 때는 라벤나 총독부를 두어 통치했는데, 베네치아와 라벤나는 바닷길로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독자적으로 성장해나갔다.

이 때 랑고바르드족을 피해 온 난민들이 오랜 기간동안 더 유입되었다.

최초의 중앙상임통치위원회tribuni maiores는 568년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말라모코와 토르첼로 등 새로운 항구들이 여럿 건설되었고, 말라모코는 점차 이 지역 중심지가 되어갔다.

751년경 랑고바르드족은 결국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무너뜨렸지만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남겨두고 있었다.

베네치아 석호 지역은 자치적으로 운영되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령이었고, 주민들이 지도자로 선출하는 직위도 공식적으로는 동로마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었다.(나중에 공식 명칭도 '도제'가 됨)

이때 총독은 말라모코 섬에 주재하고 있었고, 현재 베네치아로 알려진 리알토 지역은 그저 작은 섬에 불과했다.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본토를 휘젓고 다니면서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났고, 775년경에는 주교직이 신설되기에 이른다.(현재 베네치아 섬 동쪽 끝에 위치한 San Pietro di Castello가 주교좌였다)

한편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동로마 제국과의 세력 싸움의 일환으로 지금껏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나라도 별 신경 쓰지 않던 이 베네치아 석호 지대를 눈독들이기 시작한다.

그는 아들 피핀을 시켜 배를 건조해 이 지역을 정복하는일을 전담하도록 한다.

805년 베네치아 내부의 파벌 싸움 및 인접 도시 그라도와의 다툼으로 베네치아는 카롤루스에게 자신들을 보호령으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피핀이 베네치아를 장악하자 동로마 제국은 함대를 파견해 피핀을 몰아내고 베네치아를 수복하였다.

피핀은 이를 다시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807년 임시 휴전조약을 맺었다.

 

카롤루스에게 사신을 보낸 주모자들은 베네치아에 의해 동로마에 넘겨졌고 추방당했다.

810년 피핀은 코마키오의 선박을 빌려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당시 중심지였던 말로모코는 아드리아 해에 면하고 있어 방어에 취약했다.

결국 베네치아인들은 말라모코를 버리고 리알토로 옮겨갔다.

프랑크군은 텅 빈 말라모코를 점령해 약탈하고 불태운 다음 베네치아군을 추적했으나 리알토 군도는 계속 저항했고 물길을 잘 아는 베네치아인과 달리 프랑크군은 얕은 석호 지대의 물길에 어두웠기 때문에 일부 선단이 좌초하고 만다.

시간이 끌리며 케팔리니아 총독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제국 함대가 반격하자 피핀은 철수했지만 역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812년 새로운 적인 불가르 제국을 견제해야 했던 동로마 제국과 아들과 군사를 잃은 카롤루스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남고, 아드리아 해 일대 교역권을 인정받는 대신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에게 제위를 인정받고(다만 '로마 황제'가 아닌 그냥 '황제'로만 인정) 동맹을 채결했다.

그리고 도제 아녤로 파르티차코(811-827)는 도제의 주재지를 현재 베네치아 위치인 리알토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곳에 최초의 두칼레궁과 산마르코성당을 건설한다.

이후 꾸준히 난민들이 유입되고 주민 수가 늘어나는 동안 베네치아인들은 이 일대를 조금씩 간척해 나갔다.

이 간척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새만금이나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졌던 간척과는 큰 차이가 있다.

바다를 막아 담수화시킨 후 매립하는 일반적인 간척과 달리, 베네치아인들은 이 바다를 막을 수도 없었고 막아서도 안됐기 때문에 제방 없이 나무를 엮어 파도만 막을 수 있는 정도로 벽을 쌓고 거대한 나무 말뚝을 촘촘히 박아 기초를 만들었다.

이 말뚝 위에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그리고 점차 도시가 성장하면서 갈수록 간척지도 넓어지고 더 튼튼하게 기초를 쌓게 되었다.

11세기~12세기에는 십자군 원정에 나섰고, 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동 지중해에 영토를 가지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후로는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지역 패권을 두고 치열한 전쟁을 하게 된다.

16세기는 서유럽 국가들의 신항로 개척이 본격화되면서 지중해 항로의 중요성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베네치아의 군사적·문화적 전성기는 오히려 이 시기였다.

로마가 사코 디 로마로 인해 쇠락하자 베네치아가 르네상스 건축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한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하며 군사적 힘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후 신대륙 무역으로 인해 동방 무역 독점이 깨지고 오스만 제국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서서히 약해진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할 때 원정을 왔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Z자(혹은 S자) 형태의 대운하를 보고 경탄하여 극찬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폐지하여 멸망시켰다.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폐지된 뒤에는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합스부르크 제국에 넘겨주었다가, 1805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프랑스 제1제국에 반환하고 나폴레옹이 세운 괴뢰국인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1814년에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다시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와 옛 밀라노 공국 영토였던 롬바르디아를 묶어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으로 만들고 합스부르크 왕조 황제가 국왕으로 즉위하되 총독을 보내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배하였다.

 

1848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실각을 계기로 혁명이 일어나 이탈리아인 정치가 마닌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네토 공화국'이 세워졌지만 1년 만에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받고 다시 항복하여 도로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벌어지면서 롬바르디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영토로 합병되었고,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선언되었지만 베네토 지역과 베네치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신생 이탈리아 왕국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지자 프로이센 왕국과 손잡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했고, 전쟁의 결과 베네토까지 합병해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얼추 완수했다.

2015년 1월 1일을 기해 실시된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베네치아현에서 베네치아 광역시로 개편되었다.

 

2020년 7월 10일에 베네치아의 침수 피해를 막기 위해 건설 중인 홍수 예방시스템 '모세 프로젝트'가 첫 시험 가동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코로나19 방역조치가 해체돼 관광객들이 많이 오면서 베네치아의 관광업계가 회복하고 있다.

5세기경 베네치아 초기 정착민들은 토르첼로, 이에솔로, 말라모코 같은 섬에 살았다.

그러나 이 지역은 습지대여서 땅이 진흙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반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8세기 후반, 랑고바르드족을 피하기 위한 피난민들이 계속 몰려들면서 정주인구가 늘어나자 도시 거주인구를 늘리기 위해 단단한 기초 위에 중층 건물을 세우고 도시면적 자체를 늘려야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9세기 초반 프랑크군을 피해 말라모코를 포기한 베네치아인들은 이후 118개의 섬이 운하와 다리로 연결된 거대한 도시인 '베네치아'가 세워지게될 리알토로 근거지를 옮겨 생활하기 시작하는데, 당시에는 그저 수 많은 작은 진흙 섬이 있던 곳이었다.

사실 섬이라고 하기도 뭣한 것이 물 위로 살짝 드러난 퇴적층으로 바다 가운데 개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흔히들 베네치아의 건설을 간척이라고 표현하는데, 일반적인 간척과는 다른 독특한 면이 있다.

베네치아인들은 석호의 개펄에 통나무를 촘촘히 깊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나무로 된 기단을 그 위에 얹고, 그 위에 다시 돌을 얹어 건물을 지었다.

베네치아 건물의 건축과정이 자세히 알려진 것은 17세기에 이뤄진 연구에 의해서인데,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가 건설될 때는 1,106,657개의 나무 말뚝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나무 말뚝은 4미터 길이였으며, 베네치아의 식민지였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등 아드리아해 연안 도시들에서 나무를 실어왔다.

이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기초를 만드는 데에만 무려 2년 2개월이 걸렸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돌이나 시멘트 등에 비해 내구성이 약한 건축자재로 여겨진다.

잘 부러지고, 뒤틀리고, 부식된다. 하지만 개펄 속에 나무를 박아 넣으면서 공기와의 접촉이 없게 되면 곰팡이나 벌레가 끼지 않아 나무가 썩지 않는다.

초기 습지였던 한양(지금의 서울 지역)도 조선 초기 같은 방식으로 나무를 박아 기초를 다져가며 도시를 건설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실 물이다.

 

사방이 마시면 큰일나는 바닷물인데다 땅은 진흙이어서 지하수가 나오지도 않는다.

이에 베네치아인들은 빗물을 모아 우물을 만들게 된다. 아래 사진의 광장 지하 단면도에 구조가 나와있다.

 

광장 지하에는 거꾸로 된 돔 모양으로 돌을 깔고 그 속을 자갈과 굵은 모래로 채워 빗물이 여과되어 지하에 물이 모이게 한다.

물론 산성비 피해가 없는 것이 아닌지라 현대에서는 그냥 정수 탱크를 이용하거나 들여온다.

현대에 필요한 전기, 수도, 통신, 가스 등의 도시 인프라는 물 속에 지을 수는 없기 때문에 길 바로 아래 얕은 지하에 건설하여 묻었다.

 

베네치아 운하에 면한 건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갈수록 약해진다.

조차에 따라 바닷물이 들고 나면서 운하에 면한 벽돌이 점점 침식되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게다가 벽돌로 쌓은 벽 안의 진흙도 바닷물을 먹어 함께 쓸려 나가기도 한다.

현대에는 모터보트가 강한 물살을 일으켜 침식이 더욱 가속화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건물의 기초가 점점 약해져 위험한 순간이 닥칠 수도 있다.

또한 유속이 느린 운하에 진흙이 계속 퇴적되어 배가 다닐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를 유지보수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들이 활용된다. 우선 운하의 일정 구간을 나무로 된 임시 제방으로 막아 물을 뺀다. 그 후 운하에 쌓인 퇴적층을 준설하고, 건물의 기초를 강화시키기 위해 벽 속으로 시멘트를 주입시켜 굳히거나 오래된 벽돌을 바꾸기도 한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