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비투스 대성당(Katedrála Sv. Víta)
925년 바츨라프 1세가 성 비투스의 성해를 모시고 지은 로마네스크 형식의 교회를 15세기에 카를 4세가 고딕 양식으로 증축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공사에 박차를 가한 것은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이후.
성당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최고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스테인드글라스, 조각 등으로 채워졌다.
2톤의 은으로 만들어졌다는 성인 얀 네포묵의 묘, 알폰스 무하가 디자인한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큰 볼거리.
성당의 남쪽 탑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는 시내의 경치는 일품이며 탑에 오르는 길에는 16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종 지그문트(무게 15톤, 지름 265cm, 높이 203cm)를 볼 수 있다.
프라하의 성은 9세기 말경 보리보이 공에 의해 세워졌으며, 진흙과 돌로 된 단순한 성벽으로 해자에 둘러싸여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여러 차례 증축되어 프라하 성은 유럽에서 가장 큰 중세의 성채 단지가 된다.
이 성은 보헤미아 왕국,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체코 공화국의 정부 소재지가 되었다.
성 내부에는 성 비투스 대성당과 수녀원 이외에도,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200년 후 카를 4세의 주도 하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된 왕궁의 유적이 있다.
15세기에 후스파 전쟁으로 인한 혼란이 지나간 후 1485년 블라디슬라프 2세는 대규모 재건축 작업을 시작했다.
보헤미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합병된 이후 성은 또 다시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특히 루돌프 2세 때는 그가 16세기 말 이 성을 주요 거처로 삼으면서 많은 부분이 개조되었다.
성은 르네상스 풍으로 재건축되었고, '왕실 정원', '스페인 홀', 사격장, 공놀이 경기장 등 여러 부분이 새로이 증축되었다.
30년 전쟁(1618~1648) 동안 입은 약탈의 피해로 프라하가 누리던 번영은 쇠퇴했으며 18세기 동안에도 곳곳에서 재건축 작업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프라하는 빈이 누리는 제국다운 호화로움을 따라가려 애쓰는 지방 도시가 되었을 뿐이었다.
20세기에 프라하의 성은 체코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실제적인 표상으로 새로이 주목받게 되었는데, 특히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설립된 이후에 그랬다. 1989년의 '벨벳 혁명' 이후 프라하 성은 개조 작업을 거쳐 현재는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다. 성 안에는 여러 개의 박물관이 있는데, 이 중에는 루돌프 2세가 수집한 체코와 유럽 예술품 컬렉션도 있다.
황금소로(Zlatá Ulička)
프라하성의 방위병의 휴식처로 쓰이다 후에 하인들, 금 세공업자들이 살았던 곳. 작고 아기자기한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모습이 탄성을 자아낸다. 고유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영감을 얻기 위해 많은 예술인들이 이곳을 찾았다. 22호 집은 1916~1917까지 프란츠 카프카가 살았던 곳이며, 12호 집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수많은 체코 영화의 복사본을 은닉함으로써 체코 영화 자료를 보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영화 컬렉터 요제프 카즈다의 작업실로 쓰였다.
달리보르 탑(Daliborka)
입구부터 싸늘한 기운이 풍기는 이 탑은 1791년까지 지하 감옥으로 쓰인 곳이다.
기사 달리보르가 영주들의 폭정에 신음하던 농노들의 봉기를 지원한 죄로 1498년 최초의 수감자가 되면서 달리보르 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내부에는 중세 시대의 고문 도구와 수형 시설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