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에 위치한 한국의 대표 국립 박물관.
한국의 고미술, 유물을 중심으로 소장하고 있으며, 소장 유물 약 150만여 점, 상설 전시 유물 1만여 점으로 한국 최대의 박물관이면서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규모이다.
한국의 현대 미술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담당한다.
행정조직법상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 소속기관인데, 국가를 대표하는 박물관으로서 국내 다른 박물관을 지도·지원하는 위치에 있다.
가까운 곳에는 국립한글박물관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연혁의 시작을 순종 황제가 지은 제실박물관으로 상정해 놓았다.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 컬렉션의 기초는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 그리고 민속학의 대가 송석하가 지은 남산의 국립민족박물관 소장품을 합친 것인데, 총독부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이 모두 일제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에 예전엔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한 뒤 새로 개편하여 1946년에 '국립박물관'이란 명칭으로 덕수궁 석조전 건물에서 개관한 것으로 역사를 설명했었다.
그러나 최광식 관장이 취임한 이후 이왕가박물관이 원래는 1909년 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여 박물관의 시작은 제실박물관으로 보고, 2009년을 한국박물관 100주년의 해로 선포하고 몽유도원도 등을 비롯한 유물을 전시하는 대규모 특별전과 행사를 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총독부 박물관으로 이용하며 조선 전국의 문화재를 모으면서 규모를 넓혔다.
당시 일본제국은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처럼 식민지 유물들을 정부가 주도하여 일본 본토로 옮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선을 오래도록 식민 지배할 것이라 막연하게 착각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반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을 때는 이미 미 해군에 제해권을 완전히 빼앗겨서 대한해협 건너 일본 본토로 옮길 수도 없었다.
서봉총 금관 실물을 기생에게 쓰게 하고 기념 촬영까지 해서 물의를 일으켰던 일본인 학자 코이즈미 아키오의 회고록에 따르면, 기차 2량 분량의 가야 유물을 일본으로 도망가는 연락선으로 싣기 위해 보냈다는 부분이 있어서 전쟁 후반 항복 직전에 한국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리려는 시도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야 유물은 다행히도 나중에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유물들은 꽤 많은 수가 반출되었다. 지금까지 해외반출된 한국 문화재가 가장 많은 곳이 일본이다.
광복 이후 경복궁 경내의 총독부박물관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물과 박물관도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난가게 되었다.
북한은 조선중앙력사박물관 문서에서 설명돼 있듯, 과거 조선 왕실과 일제가 수집해 뒀던 한국사 핵심 문화재들을 그대로 물려받은 남한과 달리, 조그만 평양부립박물관 정도뿐이었기 때문에 소장한 문화재가 많지 않았다.
침공 직후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들은 아직 서울에 남아 있는 유물을 북쪽으로 가져가기 위해 박물관 직원들을 협박해서 유물들을 포장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박물관 직워들은 어떻게든 반출을 늦추기 위해 포장을 풀고 다시하는 등 시간을 끌었고, 북한 내부에서도 광복절인 8월 15일 통일을 거론하는 등 적화통일이 거의 눈앞이라 낙관적으로 생각해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빠른 속도로 북진이 시작되자 인민군은 급히 철수하느라 대부분의 유물을 서울에 두고 떠났다.
서울을 수복하면서 서울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유물을 부산으로 옮겼는데 이때 미처 옮기지 못한 대형 중국 벽화나 미라는 훼손되었다고 전해진다.
1953년 휴전 이후 서울로 오면서 경복궁 경내로 돌아왔으나 그해 10월에 경복궁 부지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 넘어가자 1954년 2월부터 구 남산분관 건물에서 머물렀으나, 6월에 남산 건물이 연합참모본부로 쓰이자 11월에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 이듬해 2월에 개관하였다.
덕수궁에 자리잡았던 시기이 1957년 12월부터 1959년 6월까지 미국 8개 도시에서 처음으로 국보급 문화재 해외 전시회를 열었으며, 1961년 3월부터 1962년 5월까지 영국·프랑스·네덜란드·독일·오스트리아에서 중요문화재 해외 순회 전시를 하여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한국사만 접했던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폭넓고 알기 쉽게 소개하는 데 노력하였다.
1960년에 학술지 <미술자료>를 창간한 후 1968년 7월 문교부 소속에서 문화공보부 소속으로 직제가 개편된 뒤 이듬해 덕수궁미술관을 통합했다.
1972년에 현 명칭으로 변경하여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신축해 이전하였다.
1973년에는 공주분관을 신설하고 1975년부터 지방분관을 '지방박물관'으로 개편했다.
1976년 보존과학실을 열었다.
그러나 1970년 정부종합청사 신축과 1982년 정부과천청사(당시 정부제2종합청사) 신설로 중앙청 건물이 공실이 되자, 해당 건물을 개조해 1986년에 이전하고 동년도에 중앙청 후생관 건물을 사회교육관으로 개편하였다.
중앙청에 둥지를 튼 시절에도 사회교육관 신설 외에 1990년 버스 이동 박물관 '움직이는 박물관'을 개설했다.
1992년에 국립민속박물관을 독립시키고 1995년 광복절에 문민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으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면서 소장품들이 임시로 근처 벙커에 들어가 있었다가 경복궁 경내의 사회교육관 건물을 개축하여 이전하였다.
이후 용산기지 골프장을 주한미군으로부터 반환하여 조성된 용산가족공원 내에 규모가 큰 건물을 신축하여 2005년에 개관하여 비로소 온전한 박물관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신축 비용은 당시 약 4,100억 원이 소요되었르며 설계는 정림건축, 시공/토목 등은 현대건설과 대우건설, 동부건설, SK건설, GS건설 5개 회사가 맡았다.
건축적으로도 1995년 한국 최초로 UIA(국제건축가연맹)공인을 받아 국제설계경기(현상설계) 개최를 통해 건축가를 선정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설계경기에는 46개국에서 340건의 작품이 응모하는 등 국제적으로 건축계에 큰 관심을 끌었다.
2차에 걸친 심사결과 우리나라의 '정림건축' 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개관 기념으로 잠시 무료 개방을 하다가 이듬해부터 입장료를 받았으나,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한시 무료 개방을 하더니 모든 국립박물관의 입장료를 폐지하여 현재는 무료다.
국립중앙박물관 앞마당 일부에 국립한글박물관을 신축하여 2014년 10월에 개관하였으며, 차후 주변 부지도 기증받아 국립민속박물관을 이전하고 전쟁기념관까지 연결하여 거대한 뮤지엄 파크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다만 현 위치가 저지대인지라 대규모 홍수가 닥치면 문화재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차관급 기관이며, 지방 국립박물관 13곳(경주, 공주, 광주, 김해, 나주, 대구, 부여, 전주, 제주, 진주, 청주, 춘천, 익산)을 거느린 대규모 기관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문화체육관광부 직속의 별도 기관이며, 국립고궁박물관은 문화재청 소속으로 모두 국립중앙박물관과는 관련이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원(문화재청 소속), 대한민국역사박물관(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전쟁기념관(국방부 산하), 독립기념관(국가보훈처 산하), 국립현대미술관(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국립해양박물관(해양수산부 산하)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앞의 국립한글박물관 역시 마찬가지로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별도 기관이다.
건물의 모티브는 한국인들이 가장 흔하게 볼 수도 있고 권위적이거나 사치스럽게 느끼지 않는 성벽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중앙박물관이라는 역사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2013년에 동아일보와 건축 전문지 SPACE가 국내 건축가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로 나온 월간 SPACE 선정 한국 현대건축 태작에서 17위로 랭크되기도 했다.
2009년에 국립중앙박물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했다.
이때 누가 한국 최고 최대 박물관 아니랄까 봐 몽유도원도, 훈민정음 해례본, 천마도 같은 평소에 보기 힘든 국내외의 여러 박물관, 미술관에서 엄청 귀한 유물을 보내 축하했다.
전국의 역사학도, 미술학도를 비롯해 문화 계통에 관심있는 사람은 남녀노소 몰려와서 장사진을 이루었다.
특히 몽유도원도는 1인당 1분만 볼 수 있도록 관람을 제한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특별전은 무료로 관람 가능했다.
해당 특별전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위상이 어떤지 잘 보여준 전시였다.
2012년 이명박 정부 당시 영부인 김윤옥 여사가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한 국가 정상들과 만찬을 가졌는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국립중앙박물관이었다.
그것도 강당이나 교육관이 아닌 유물을 전시하는 제1전시실. 박물관에는 음식은커녕 음료수 한 잔도 들고 가지 못한다.
이렇게 상식에 어긋난 행동에 대해 전우용이 "미친 짓"이라며 비판했는데, 박물관 측은 "뉴욕이나 프랑스도 국립박물관 안에서 만찬을 즐길 수 있다."라든가 "유물들은 모두 벽부장으로 격리되었고 온습도 조절 장치가 있어 피해는 없다."라고 해명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국-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콜베르 재단과 연계하여 2015년 5월부터 8월까지 전시회를 열고 싶어했다.
별 문제가 안 될 듯한데 문제가 되었다. 콜베르 재단은 카르티에, 루이비통을 비롯한 프랑스 명품 업체들의 연합체로, 쉽게 말하면 명품 전시회를 이곳 국립박물관에다 열려고 했다는 것.
당시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상업성이 강한 전시는 할 수 없다."라며 완강히 반대하면서 전시회는 무산되었다.
2016년부터는 용산 이전 이후 10여년간 사용한 금색 로고에서 정부상징으로 로고를 교체하였다.
2018년 광복절에 '정부수립 70주년 및 광복 73주년 기념식'이 본 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대략 2020년을 전후로 한 시점부터 2016년 이전의 로고를 박물관에서 제작한 기획전 포스터 등에서 다시 사용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로고를 복구한 것이 아님에도 예전 로고를 사용하는 이유는 불명이었다.
2021년 11월 15일 세계일보의 취재 결과 예전의 로고를 현재의 정부상징과 병용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2022년 10월 24일, 국회 국정감사 과정에서 행정안전부가 박물관이 자체 로고를 복구시킨 사실을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자체 로고를 사용하려면 행정안전부와 협의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행안부는 일부 국립박물관들이 자체 로고를 복구시키거나 새로 만드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지적한 이상헌 의원은 자체 로고를 정부상징과 병용하는 것은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이번 기회에 정식으로 관련 규정을 마련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후에도 자체 로고를 현재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면 어찌저찌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정부로고를 국립 박물관 로고로 사용하는 예는 전세계적으로 드물다. 행정편의주의에 문화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각 정부 기관이 각각의 로고를 사용하다 단일 정부로고를 사용케 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역시 흑백일 때는 완전히 의미 없어지는 로고로 비판이 많다) 박물관까지 통일 시킨 것은 너무나 기계적인 조치이다.
주차장 가는 길
주차 요금
※ 주차공간이 부족하오니 관람객께서는 대중교통(버스,지하철)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전자주차관제시스템으로 요금이 자동부과되며 지하주차장의 무인정산기를 이용하시면 출차가 빠릅니다.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운영시간 : 10:00 ~ 18:00 (입장 마감은 폐관 30분 전까지)
전화번호 : 02-2077-9000